스카우트 로그, IF 직업은 서예가
도코노마를 마주 보고 다소곳히 앉아 그는 가만히 찻잎을 물에 담궜다. 적당한 온도로 우린 것을 내 앞으로 밀어 주고서는, 제 앞에는 그 반도 안 되는 물을 부어 찌푸리지 않고는 마시기 쉽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낸다. 자정보다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으니만큼 진하게 우린 차가 필요하지도 않을 터이데, 그는 농축된 액체를 미간 한 번 구기는 일 없이 차분하게 입 안에 머금는다. 녹색 눈동자에 연한 녹색을 띤 찻물의 일렁이는 표면이 비치어 드리우는, 약간 짙어진 음영. 단단하게 차려 입은 하오리는 머리칼보다 연한 회적색이다. 늦가을의 적요는 늘 어느 정도는 가식적이다. 방 안은 가끔 소매 단이 다다미 바닥에 스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오의 나른한 침묵 속에 완전히 잠겨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공기 중에 섞여 드는 햇빛의 간지러운 기척에 고개를 들면 햇살과 벽 사이의 그 어드메에서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는 다시 소리 없이 찻잔을 집어든다. 이제 어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갸름한 옆모습. 그는 늘 남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모습보다는 고요한 편이었다. 불꽃이 두 개에 태양이 두 개, 자조적으로 소개하곤 했던 이름에서 연상하기에도, 선명한 적색의 머리카락이나 뚜렷한 적의를 품고 날카로워지곤 하던 진녹색 눈매에서 상상하기에도, 카렌 마사유키의 둘째 아들은 차분한 성정의 사람은 아니었을 터이니.
"계절의 색채가 무엇이냐고?"
그는 찻잎이 눅눅하게 풀어질 때까지 충분히 오래 우려 내고는 남은 것을 천천히 체로 거른다. 우려낸 액체 위에 옅게 서린 김을 조심스럽게 불어 걷어내는 모양새에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카렌 아스카는 놀랍게도 고요해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고, 그 나이대의 다른 소년들보다 더욱 그렇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의 그는 오히려 서늘해 보이기까지 하는 적막 속에 영원히도 머무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초와 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시간에 익숙하고, 온전히 홀로 무언가에 열중하는 일에 능숙하다. 붓을 들 줄 알았고, 목례할 줄 알았고, 낭송할 줄 알았듯이. 샤미센이나 먹을 집어들 때의 얌전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하마터면 믿어 버릴 정도로. 멈추어 있는 방 안의 공기가 답답했던지 그는 장지문을 조금 열어젖히고, 순간 방을 둥글게 돌아 지나간 차가운 바람에 하얗게 언 숨결이 흩날린다. 나는 가만히 손 안의 찻잔을 들여다 보았다. 그것을 꼭 쥐고 있는 손에 의해 열을 다소 빼앗긴 미지근한 액체. 평온했던 표면이 천천히 일렁이며 비추어졌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다. 그에게 타인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일그러진 형상, 섞이지 않는 온도, 발맞출 수 없는 속도. 나는 곧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남아 있는 액체를 남김없이 속으로 흘려 보냈고 잔의 바닥에는 불탄 재의 모양을 한 찻잎이 부스러기로 남았다. 문득 들여다 본 그의 찻잔에서는 쓰린 냄새가 났다. 혼탁하게 뒤엉킨 찻잎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작고 혼란하고 쓰라린, 나로서는 온전하게 볼 수는 없는 세상. 나는 그가 보는 남이라는 존재가 항상 그러할 것임을 안다.
이제 그는 장지문을 닫는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돈하고서는 식은 찻잔을 집어들고 잠시 동안 바라본다. 새 것을 우릴지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 결국엔 전부 마셔 버리고서 다다미 위에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잔의 바닥을 확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그와 다른 이들의 차이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잔의 바닥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오직 자신만을. 두 사람만이 마주 보고 앉아 있기에는 넉넉히 남는 방 안은 온통 정갈한 각도로 얼룩져 있다. 다다미의 반듯한 귀퉁이, 적당한 높이로 바닥에서부터 솟아 오른 도코노마, 족자의 검은 모서리. 방 바깥에 비하자면 턱없이 작지만 한 사람의 몫으로는 지나치게 넓은 공간 안의 결벽적인 명확함이 카렌 아스카가 아는 전부임을 나 역시 안다. 그러니 그는 평온해질 수 없다. 자신의 윤리, 자신의 도덕, 자신의 결벽 바깥의 세상에서는. 지나치게 불안정하고 나약하며 변명이 많은, 장지문을 통해 걸러져 들어오는 햇살이 아닌 썩어 가는 낙엽의 악취가 있는 저 문 너머의 늦가을에서는. 그는 이내 자리에 앉고, 길다란 손이 서랍을 열어 종이와 붓을 꺼낸다.
"봄의 꽃잎은 담홍등淡紅藤."
종이는 두껍고 약간 거친 재질이고, 먹은 매끄럽게 흡수되지만 더 번지지는 않은 채 붓이 닿은 자리에 적확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가 오롯이 검은 글씨로 그려 나가는 계절의 색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다.
"그 밑에서 싹터 가는 땅은 이엽색裏葉色. 초여름의 잎사귀는 심벽深碧, 길어진 해질녘의 마무리는 은주銀朱, 떨어지는 밤과 깊어지는 바다의 색은 청람靑藍. 저무는 땅은 양매楊梅, 익어 가는 낙엽은 호색狐色. 눈송이와 얼어 가는 땅, 차가운 바람의 색은 백람白藍."
"겨울이 지나면?"
" ... 겨울이 지나면?"
나는 그것이 우문임을 알고 있고, 그는 질문의 어리석음을 짚어 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답한다.
"그렇다면 다시 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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