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 .. ... (애초에 캐어필을 하기는 했던가?)
위의 브금 플레이어에서 ギブス 틀고 들어주시면 감사합니다.
오늘이야말로 떠올리지 않는다.
쿠스노키 미하루樟 三春 를 이제 떠올리지 않는다, 고 생각한 팔 월이었다.
물컵이 떨어졌다. 차가운 물이 발등 위로 엎질러진 자리가 데인 듯 시렸다. 세로로 우뚝 선 뼈와 가로로 얽힌 힘줄들을 덮고 있는 물의 막 밑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살갗을 가만히 보고 있던 카렌은 이내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먼저 어깨나 배꼽 같은 곳들에 얹힌 물을 적당히 닦아냈고 이윽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방울들을 정성 들여 닦았다. 현관 옆의 거울에 낀 먼지가 눈에 띄었기에 그것도 윤이 나도록 닦았고 더러워진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두었다. 거울 속에 비친 마른 상체에 감옥처럼 선명한 갈비뼈의 흔적이 보였다. 카렌은 자기 자신을 마주 보고 고요하게 한 번 심호흡했고 갈비뼈들이 덜그럭거리며 시끄럽게 숨을 쉬었다. 깨지지 않고 반투명한 금이 간 컵을 주워 들어 싱크대에 넣으며 그 날 저녁 부모님께 부칠 편지의 시작하는 문장을 미리 생각했다. 배계, 존경하는 어머님과 아버님께. 신장이 오 센티미터 자랐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 반 년만에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성장 아닐까 합니다. 체중은 그만큼 붙지 못했습니다. 신장이 자란다는 일은 세로만큼의 부피를 가로에게서 빼앗는 일일까요. 뼈와 뼈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숨을 쉴 때면 가끔, 어딘가가 부러져서 찔린 듯 아픕니다. 어쩌면 문제는 갈비뼈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첫 번째 문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머릿 속에서 삭제했다. 골반에 걸쳐 입은 청바지 위로 아직도 입고 있지 않았던 티셔츠를 꺼내 덧입었다.
룸메이트는 그 날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늦었다. 카렌은 무료하게 제 침대에서 제 것이 아닌 고양이를 쓰다듬다 곧 두 발짝 떨어진 제 것이 아닌 책상으로 옮겨 앉는다. 룸메이트는 같은 밴드의 키보디스트이고 붉은 머리와 함께 살기에는 어울리는 색인 밝은 싸구려 탈색 금발 머리를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게 깎았으며 작년에 이미 스무 살이 되었지만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뒀을 수 있을 정도로는 겁이 없었다. 얼굴을 맞대고 공간과 시간을 함께 쓰기에 적당한 부류였다. 카렌은 만용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뻔뻔하고 무감각하며 자기만의 방식을 가진, 쉽게 상처받지 않는 사람들. 팔꿈치를 조금 멀리 뻗자 두꺼운 양장 하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날 들어 두 번째로 바닥을 뒹구는 물체를 집어 들며 카렌은 혹시 그 소리가 2층의 얇은 나무 바닥 위로 울리기에는 지나치게 컸을지 숨을 죽이고 아래층의 소리를 듣는다. 사람의 언짢은 기척이 아니라 낡은 라디오의 잡음이 들리자 귀를 뗀다. 양장은 보기보다 무게가 가벼운 편이다. 펼쳐 보고서야 그것이 플라스틱 슬립으로 이루어진 앨범, 그것도 반 정도밖에 차 있지 않은 앨범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께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으나 절반밖에 채워져 있지 않다. 제게 앨범이란 물건은 갖고 있기나 한 것이었던가. 사진보다는 거실의 도코노마에 걸린 족자봉 속의 그림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는 카렌은 말없이 룸메이트의 앨범을 펼쳐 들고 천천히 훑는다. 대부분이 싸구려 폴라로이드이고 끝이 바래기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제 붉은 머리나 드러머의 귀신처럼 긴 머리가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룸메이트 본인의 머리카락이 아직 금발이 아니며 뒤통수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게 짧지도 않다. 폴라로이드의 귀퉁이에 마카로 쓰여진 날짜를 확인한다. 날짜보다도 교복이 그 사진이 찍힌 시기를 말한다. 룸메이트는 고등학교를 반 년 정도밖에는 다니지 않았다. 반 년만에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앨범의 반 정도를 채웠다는 말이다. 반쯤 찬 앨범의 의미가 새삼스레 달리 읽히기 시작한다. ㅡ당신은 늘 사진을 찍고 싶어하지. 밑층의 라디오가 희미하게 지직거리며 노래했다. 당신은 늘 절대적인 것을 말하고 나는 늘 그걸 싫어해.
떠올리지 않는다.
떨어진 앨범을 본 직후부터 이미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카렌 아스카는 시인한다. ㅡ I wanna be with you, 곁에 있어줘. 시이나 링고가 날카롭게 노래했고 카렌은 곁에 있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 답을 적어도 오래 된 사진을 본 직후라면 영영 알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 앨범을 닫고 침대로 돌아가 천장을 마주 보고 반듯히 눕는다. 고양이는 어느샌가 방 밖으로 나가 있고 무언가 뒤지는 듯한 소리 끝에 축축한 천이 바닥으로 어질러지는 소리가 난다. 빨래 바구니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을 조그맣고 털이 긴 생물이 가장 가까이 있는 기척일 때 사람은 혼자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알 수 없다. 카렌은 남과 부둥켜 안을 때조차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ㅡ어제의 일은 잊어버리고 나를 꼭 안아줘. 이를테면 무엇을 잊는다면 좋았을까. 어제를 지나 오늘이 되었는데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일은 이미 의미를 가져 버린 것이 아닌가. 의미 있는 것을 잊는다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의미 없는 것을 기억하는 일은 가능하던가. 귓가에 웅웅거리는 가사는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들려오는 어절과 의미를 가진 소리들이란 대체로 전부 그랬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베개에 조금 더 깊이 체중을 싣고 눈을 감아도 무엇을 잊어야 할지 떠올릴 수 없어 떨어진 컵을 떠올렸다. 발등 위로 쏟아진 물이 지나치게 차가웠던 탓에 시려 왔던 것을, 아픔이 느껴졌던 것을. 분명 잊으려 떠올렸던 것이었으나 이제 잊히지 않는다. 잊는 일을 포기하고 잊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ㅡ하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내가 낡아 버리는걸. 잊혀지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는 심정을 상상한다. 낡더라도 변하지 않기 위해. 빛바래더라도 망각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사진에 찍힌다는 일을 아득하게 느낀다. 함께 낡아가고 싶은 마음을 어지럽게 재구성한다. 부모님이 계신 집의 책장 어딘가에 얇은 먼지가 끼인 채 가지런히 꽂혀 있을 검은 양장 표지의 졸업 앨범들을 생각한다. 몇 년에 걸쳐 같은 사진들의 구석 자리에서 함께 덜 앳되어져 갔을, 그 앨범들의 어디엔가 반드시 찍혀 있을 반듯한 얼굴의 쿠스노키 미하루를, 종래에는 완전히 떠올리고야 만다.
떠올리지 않는다. 떠올린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간직하며,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하고 잊지 않기를 소망한다. 부정될 수 없는 시간을 프레임 속에 가둠으로서 함께 낡아 가기를 소망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지워 꿈의 무게를 지워 마음의 무게를 지워, 족쇄가 되어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사람의 마음인가.
사람은 잊혀지고 싶지 않아 하는 존재라고, 아무도 내겐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삐걱이는 소리가 심한 매트리스로부터 천천히 돌아 눕는다. 백팔십이 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진 사람치고는 대단치도 않은 체중이 실리자 갈비뼈가 뻐근하게 아팠다. 그 날 들어 두 번째로 어쩌면 문제는 뼈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흉곽 안에 든 것의 아픔의 원인을 파악하기에 카렌은 아직 소년이고 어떠한 것들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는 소년이다. 어느샌가 돌아온 고양이가 천천히 손을 핥아 카렌 역시 손을 뻗어 보송거리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앓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옆구리로 파고든다. 갑자기 명치를 파고들어 오는 묵직한 무게감에 이제는 카렌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낸다. 숨을 쉬는 동안 갈비뼈가 계속해서 아팠다.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면 늦은 성장통이 될 것이다. 흐릿한 아픔 속에서 눈을 감는다. 라디오의 소음이 천천히 종식해 갔고 룸메이트가 문을 열고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배계, 존경하는 어머님과 아버님께.
신장이 오 센티미터 자랐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 반 년만에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성장 아닐까 합니다. 체중은 그만큼 붙지 못했지만, 몸이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응당 붙었어야 할 무게가 아닌가 합니다. 잃어버린 것은 언제고 주인을 찾아온다고 제게 그리 가르치셨던가요. 벽을 보고 뒤돌아 서서 훌쩍이던 어린 시절에는 그게 참으로 분했습니다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가르침 중에는 무엇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고. 그 사실이 가끔 굉장히 괴롭게 다가옵니다만,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식인 저는 틀리지 않았다고.
그러나 그렇게 옳으실 수 있었다면 어째서 제 무게만을 짊어지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는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뒤늦은 깨달음이나마 미흡한 자식은 깨치었습니다만, 타인의 무게 역시 응당 짊어질 몫이라고 조금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의 아니게 자꾸 에둘러 말하는 로그만 쓰게 되어서) 말로 정리한 핵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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