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2017. 6. 5. 13:06 from RondoStage






   초여름의 붉은 물이 손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렌은 잠시 손 안에서 짓이겨진 과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T는 그것이 아주 드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T는 카렌에게 티슈를 건네고 카렌은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 붉은 물을 꼼꼼히 닦아낸다. 그러나 으깨진 체리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카렌은 여전히 그것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기에 T는 약간 뭉개졌을 뿐 과육이 남아 있는 체리를 대신 집어 제 입 안으로 넣는다. 입 안에서 터지는 과즙을 알뜰하게 삼켜 내며 실로 드문 일이다, 라는 조금 전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굳건히 한다. 4년째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상대이자 2년째의 동거인이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이 처음 밴드라는 명목으로 묶였을 때 카렌은 실제로 소년보다도 아이에 가까운 나이였으나, T가 기억하기에 카렌은 한 번도 나이에 맞게 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년기를 겪지 않고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 같았다.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더 이상의 변화를 겪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완고한 소년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저보다 네 살이 어린 그의 섣부른 스카우트 같은 것을 받아 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짧은 회상을 끝내며 T는 무성의하게 체리 꼭지를 떼어내는 카렌의 지루한 듯한 얼굴을 본다.


   변화는 사소했으나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체리를 똑바로 잡고 꼭지를 비틀어 떼어내는 손톱에 칠해진 반들거리는 검은 매니큐어 같은 것. 카렌이 손을 꾸미는 것을 특별히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서도, 색색의 손톱은 베이시스트에게는 불필요한 장식이었다. 원래부터도 잘 갈라지는 손톱 때문에 영양제를 바르고 다니던 베이시스트라면 더욱 그랬다. 낯선 것으로 말하자면 피로한 기색인 표정과 명확한 목소리 사이의 차이도 마찬가지였다. T는 카렌의 깨끗한 목소리보다도 잔기침이 섞인 잠긴 목소리에 익숙했고, 초저녁부터 피로로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는 모습보다는 곡 작업으로 인해 늦게까지 깨어 있는 모습을 더 자주 보았었다. 작업에 몰두하면 그 이외를 잊는 성격이었고,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제 체력을 지각 있게 분배할 줄 알았고, 힘이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목이 약했으므로. 약한 통증이 있는 듯한 팔을 문지르며, 의식적으로 생각을 차단하는 듯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시선을 벽 어딘가에 고정시키고 있는 멍한 얼굴. 근래의 그는 흐트러진 듯한 모습이었고 그것이 T에게는 무엇보다 생소했다. 저 소년이 저토록 명징하지 못했던 일은 적어도 T의 기억 속에는 없다.


   끈적이는 손가락을 닦아 내고 카렌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 위로 몸을 비스듬히 기댄다. 의자 바깥으로 달랑거리는 긴 무릎을 T는 가만히 지켜본다. 자주 피멍이 들어 있고는 했던 솟아오른 뼈. 그 위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카렌은 다시 붉게 물들어 가는 머리카락의 끝을 내일은 검게 덮어야겠다고 말한다. 또 다른 변화. 그 변화의 바닥을 읽어 낼 권리가 T에게는 없다. 무릎 위로 힘없이 늘어진 손에 그저 힐끔 시선을 주며 T는 말한다.




   "웬 매니큐어야."

   "무대 때문에."

   "학교?"

   "응."

   "지우고 오지."

   " ... 잊어버렸어."

   "지우지 않으면 곧 벗겨질 텐데."

   "당신이 지워 주려고?"

   "녹음해야 하잖아, 너."




   카렌은 T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T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반복한다.




   "녹음해야 한다고. 잊어버렸어?"

   "... 잊지 않았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렌은 결코 중요한 일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저 검은 손톱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거슬리는 라벨처럼 따라 붙는 것 같아. 카렌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왼팔로 눈을 가린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고 T는 속으로 혀를 찬다. 무엇이든 명확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두 번 말하게 하는 성가심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카렌의 쪽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명확하고, 한 톨의 금도 없이 강한 것에 4년을 길들여 두고서는.




   "손톱 약해져, 계속 바르면. 넌 원래도 약하잖아."

   "... 주의할게."

   "신경 써. 넌 아이오닉의 아스카잖아."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

   아주 잠시라도, 찰나일 뿐이라도, 길을 잃은 듯한 표정. 취약해진 표정. 카렌은 눈을 깜박이고는 이내 내려 닫는다. T는 옅은 피로가 내려앉은 창백한 눈두덩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혓바닥 밑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다. 목소리 대신 팔을 혹사하고, 손가락이 아닌 무릎에 피멍이 들면서까지 의미 없이 헌신하고 있는 일이 네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 이전에 너는. 내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잠시 드러났던 녹색 눈동자를 회상한다. 어두운 홍채 밑으로 단단하게 가라앉은 세로로 좁은 동공이 평소처럼 날카로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대신하여 가라앉아 있던 것은 짙은 탈력감이었다. 정말이지 비겁한 일이다. 매정하고 날 선, 치켜 뜬 시선에만, 하나의 가능성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단 하나의 바름 외의 모든 것을 지워내는 단호함에만 익숙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마치 언제나 금속처럼 차갑고 강인하기만 할 수 있다고,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어도 너만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어 두고서는.

   이제 와서 단 한 순간이라도 소모될 수 있던 사람인 것처럼. 길을 잃을 수 있던 사람인 것처럼. 결국은 열아홉 살짜리 소년일 뿐인 것처럼.




   "알고 있어."




   대답은 느리게 돌아오고, T는 반문하지 않는다.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늘 무엇이 올바른지 알고 있었으니까. 카렌은 천천히 눈을 가렸던 팔을 떼어내 식탁 위의 체리를 집어 든다. 끝이 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다. 과연 그럴까, 하고 묻는 것만 같다. 아니, 그렇게 제 자신에게 반문하는 T 스스로의 목소리가 단순히 그에게 비쳐 보인 것뿐일지도 모르고. 곧이곧이대로 사람을 상처 입히곤 하던 붉은 자기 확신의 흔적을 카렌은 다시 안전한 흑색으로 덮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T는 카렌의 손가락 위에 놓인 체리 한 알을 본다. 카렌은 검은 손톱을 세워 그 안으로 깊게 박아 넣는다. 갈라져 즙이 터진다. 그는 그것을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이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붉게 물든 손톱을 닦아낸다. 끈적한 단 내만이 공기 중에 남는다. 








Posted by A-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