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doStage

樟 三春

A-S-T 2017. 3. 31. 02:45





쿠스노키 미하루는 이 글의 화자이기도 함










     문득 그러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 못할 것도 없었던 날씨의. 온화한 햇볕이 들고 온화한 바람이 불었던 날의. 가쿠란까지 반듯하게 챙겨 입고 있었으나 목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넥타이는 매고 있지 않았던, 그러나 별달리 그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기를 바라던 것도 아니었던. 검고 하얀 교복을 입고 아직 뒤축이 뻣뻣한 스니커즈를 신고, 자판기에서 녹차 한 캔을 들고 뒤돌아 보던 풍경. 아스카 하고 불렸기 때문에 네 하고 뒤돌아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예상하던 것은 다른 선배의 얼굴이었으나 몇 안 되는 편히 말하는 상대 중 하나인, 그러나 친밀한 사이이냐고 묻는다면 또 얼마간 망설여야 할 동급생의 얼굴이 비쳤기에 약간 어색해진 입을 이내 다물었던. 이름은 마사미였던가 코우시였던가, 명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어 몇 개의 다른 이름들을 한꺼번에 떠올려야 했던. 그저 그렇구나 너도 나를 아스카라고 부르고 있었구나, 라고 별다른 무게가 실리지도 않은 매정한 생각을 하며 반질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았던 오후로 넘어가기 시작한 오전을. 마주 본 생김새는 눈썹이 곧고 반듯한 생김이었고 가쿠란 위로 쿠스노키라는 노란 명찰이 단단하게 매달려 있었던. 여전히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없었기에 아스카라고 불렸는데 쿠스노키라고 답변한다면 매정한 일이 될 것이다, 라고 답지 않은 고민을 하며 손에 든 캔 녹차의 풀탭을 천천히 젖혔던 일을.




"나, 전학 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 쿠스노키가 그렇게 말했기에.

대관절 이 일을 나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이고, 단정한 두 눈썹 위로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결심을 얹고서 마치 선고하는 듯한 말씨는 또 무슨 영문인지. 그저 느리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던 일을.




" ... 그래."




달리 답변할 말이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건강하기를."




그러자 쿠스노키는 그 단정한 눈썹을 찌푸리고선. 딴에는 단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듯한 입매도 하얀 뺨도 찌푸리고선, 이번에는 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이다. 빈말로라도 나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겠으나 급우의 건강 하나 빌어주지 못할 정도로 정이 없지도 않다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러한 반응의 이유를 알 수 없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아마 내 표정 역시 무덤덤한 눈썹은 약간 치켜 올라가고 입매는 외려 얇게 늘어나, 마주 의문을 표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의 표정은 몰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기억해 낼 수는 없는 일이기는 하나. 쿠스노키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거렸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마 숨을 들이쉬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그는, 비록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내 앞에 서 있다는 일에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소라노사키로 갈 거다."




짧은 긴장을 이완시키기 위한 숨 다음으로 이어진 말이었다. 하늘의 저편으로 간다는 말이 어떠한 장소를 뜻한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어린아이다운 야망으로 가득 찬 듯 들렸을 법도 한, 미묘하게 희망찬 어조를 차치하고서라도 내게 있어서 의미를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장소의 존재조차도 그 때의 나는 알지 못했으므로. "그래." 나는 그저 명확하게 반복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바라든 정진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그 외의 어떤 말을, 정말인지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그 표정, 단정한 눈썹은 괴로운 듯 한데 엉겨 붙고, 반듯한 입매는 무너지고, 단호한 뺨은 떨리고, 눈을 질끈 감듯 내리 깔린 속눈썹 너머로 검은 눈동자가 망연하고 초점이 똑바른 시선으로 나를 꿰뚫을 듯 노려보고 있었던. 그 표정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그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전이 오후로 바뀌어 가고 봄이 여름으로 익어가던 그 투명한 햇살 속에서 이유 모를 원망을 받아내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던 것은. 아니, 어쩌면 그 표정이 새롭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망받는 일에는 익숙했으므로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새 기억해 내지 못하는 어느 날의 너를 부수었겠구나 하고 깨달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너는 나를 질타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대신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눈썹과 입매와 뺨과 속눈썹에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단 한 마디의 반응을 원한다는 간절함을 매달고 얼굴을 잔뜩 망가뜨리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스스로 기억해 낼 수 없었던 어느 날의 너를 부수었을 나는 분명, 너도 아마 알고 있었다시피, 상냥하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하고, 애원의 뒤편을 읽지 못하는 매정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어서,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그 자리에서 사라졌으므로.



.

.

.



그러니까, 떠올리게 되는 때가 있다. 쿠스노키 미하루樟 三春 를 등 뒤에 내버려 두고 뒤돌아 섰던 날을. 이제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교정에 서서. 이제 가쿠란은 입지 않고 넥타이를 약간 비뚜름하게 매고서.

마치 속죄하듯이.